하루 4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P(42)씨는 최근 들어 항문이 가렵기 시작했다. 가려움을 줄이려고 매일 두 번 이상 항문을 비누로 씻고, 꽉 끼는 옷 때문인가 싶어 헐렁한 바지를 입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의료기관을 찾았고, 결과는 과도한 커피 섭취가 영향을 미친 ‘항문소양증’이었다.
‘항문가려움증’이라고도 불리는 ‘항문소양증’은 항문 안쪽이나 그 주변이 가렵고 타는 듯 화끈거리는 질환으로서, 속옷에 분비물이 묻어나오기도 한다. 항문소양증은 술이나 담배를 많이 하는 사무직 종사자에게 많이 나타난다. 40~60대에서 흔하고, 남성이 여성의 4배 정도 많다. 섬유소가 부족한 식단을 먹는 사람과 비만인 사람에게서 더 흔히 나타난다.
덥고 습한 날씨에 땀이 많이 나면 항문소양증이 악화되기도 한다. 가렵다고 계속 긁거나 자극을 주면 피부가 손상될 수 있고 염증이 생길 수 있다.
항문소양증 원인은 음식이나 특정 약물일 수도 있고, 피부 자체 문제일 수도 있다.
과도한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이 영향을 미친다. 카페인은 알레르기를 촉발하거나 항문 주변 피부를 예민하게 만든다고 알려졌다. 커피 외에 홍차, 콜라, 초콜릿, 우유, 치즈, 토마토, 맥주, 포도주, 오렌지 주스 등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것도 가려움증을 촉발할 수 있다.
피부 자체 문제로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건선, 항문 주위의 과도한 마찰, 항문 주위의 과도한 땀 등이다. 항문 청결을 유지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간지럽다고 과도하게 자주 비누로 씻거나 비데를 사용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항문을 보호하는 기름막이 벗겨져 손상되면서 세균이나 곰팡이가 증식하기 좋은 환경이 될 수 있어서다.
정신 자극도 항문 가려움증의 한 원인으로 꼽혀서 스트레스가 커지면 악화된다.
유해한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해당 화장지가 지닌 형광증백제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무해한 두루마리 화장지로 바꿔주면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다. 유해한 두루마리 화장지 사용으로 인한 피부 질환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항문가려움증이 심해 의료기관을 찾으면 우선 연고를 이용한 약물 치료를 한다. 1개월 이상 약물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다면 알코올 주사요법이나 피부를 얇게 벗겨내는 박리술을 고려한다.
알코올 주사요법은 감각신경을 마비시켜 마취효과를 얻는 것으로서, 항문으로부터 7~10cm 떨어진 네 군데에 40% 알코올 7~10cc를 균등하게 피하 주사한다. 2분 가량 후 감각이 돌아와 치료 효과를 바로 알 수 있다. 피부나 근육 내에 주사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필히 대장항문 전문의에게서 치료받아야 하며 2일 가량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
피부박리술은 항문에서 5cm 떨어진 좌우 양측 피부를 절개한 후 항문 주위 피부와 점막을 벗겨내는 치료법으로서, 항문소양증이 아주 심한 경우에만 실시하는 치료법이다.
항문소양증 예방
1. 항문 주변을 청결히 해야 한다. 배변 후,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 항상 항문 주변을 닦는다. 비데 사용 보다 좌욕을 통해 항문 주변 피부의 갈라진 틈새에 낀 작은 이물질들이 모두 빠져나가도록 한다.
2. 좌욕 이후 항문 주변을 잘 건조시킨다. 수건이나 아주 부드러운 종이로, 문지르기보다는 부드럽게 두드려준다는 느낌으로 닦아 준다. 다만 너무 건조시키면 가려움증이 심해질 수 있어 약풍 정도의 선풍기 바람으로 말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항문이 가렵다고 해서 처방받지 않은 연고나 크림을 막 바르면 안된다. 연고 가운데 기름기가 많은 것은 피부를 축축하게 하거나 알레르기를 촉발할 수 있다.
4. 규칙적인 배변습관을 들인다.
5. 조이지 않는 통기성 좋은 속옷을 입는다.
6. 커피·홍차·콜라·우유·치즈·토마토·초콜릿·맥주 같은 식품 섭취를 줄인다. 이런 식품은 소화흡수된 뒤 배설 시에 항문 주변 피부를 자극한다.
당대의 세계 최고 선진국이었던 송나라
거란과 금(여진), 몽골 등에 시달렸던 당시에 중원의 송’은 내부를 들여다보면 언뜻 이해되질 않는다. 금나라에 의해 무너지기 전인 북송 시대만 해도 송나라의 인구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1억 명을 돌파했다. 덕분에 상비군만 100만 명 이상을 유지했던 당대 세계에서 어깨를 겨눌 상대가 없는 대국임이 분명했다.
반면 송을 들들 볶았던 거란의 정예병은 10만 명이었고, 북송이 멸망했던 ‘정강의 변’ 사건 당시 수도를 포위했던 금나라 군사는 6만 명에 불과했다. 몽골도 세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 전체 인구가 약 100만~200만 명이었다. 이런 압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국 송이 건국 시기부터 일방적으로 (인구 상) 주변 소국들에게 질질 끌려다닌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호기심을 더 자극한 것은 군사력보다 경제 분야다. 송나라의 산업 발전은 당대 유럽 어느 국가도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가령 1078년 송나라의 철강 생산량은 12만5000t이었는데, 이는 1788년 영국 산업혁명 당시 철 생산량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송대에는 철을 단련하는 용광로와 수력 방직기, 화약과 강노, 물시계 등이 발명됐고, 건축에 아치형 다리와 받침대가 쓰였다. 조선업이나 항해술도 대단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나침반과 수력 터빈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양쯔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됐던 점과 계단식 논을 통한 쌀의 집약적 재배가 가능해진 점이었다. 잉여 식량이 생산되자 상업이 발달했고, 이와 더불어 운송, 숙박같은 서비스업 등도 함께 발달했다.
지폐와 어음도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옥스포드 너필드 컬리지의 스티븐 브로드베리 교수가 2017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송나라는 1020년에 1인당 GDP가 1000달러(1990년 가치 기준)를 돌파했다. 영국이 1000달러를 돌파한 것은 이로부터 400년 가량이 지난 1400년대부터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송나라가 왜 산업혁명 목전까지 가고도, 결국 도달하지 못했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영국보다 약 500년 앞선 송대에 산업혁명을 시작했다면 세계사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을 테니까. 과연 무엇이 송나라의 산업혁명 진입을 막았을까?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중국이 산업혁명에 진입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춘 이유를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애덤 스미스 : “중국의 법률 제도 가운데 백성들의 재부 증가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다. 중국은 사법정책의 집행에서 공정성과 일관성을 상실한 결과, 성장 잠재력을 잃고 정체되고 말았다. 계약이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상업과 제조업이 장기적으로 번성한다는 일은 거의 발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