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 선악과
Q : 신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아담과 이브가 따먹도록 방치했는가?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면 아담과 이브가 따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P 목사 : "성경에 제기된 난해질문 중 하나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예로 들 수 있다. 자동차가 없었다면 사고가 없었을 테고 인명 피해도 없었을 텐데 왜 자동차를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잘못일까? 아니면 난폭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 초보운전으로 사고를 낸 사람의 책임일까?"
"선악과는 신과 인간이 맺은 최초의 언약이다. 약속은 지키면 되지만, 깼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대행자인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신은 선악과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P목사의 답에도 신이 선악과를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비켜갔고,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후 인간과의 약속이나 책임만을 언급하고 있다.
자동차와 선악과를 비교함은 적절치 못하다.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로서 명확한 편익을 제공하나 선악과는 제공하는 편익이 전혀 없고 불미스러울 가능성만 지녔을 뿐이다. 선악과는 제공하는 편익이 전혀 없어 아래의 붉은 상자와 비교함이 온당하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러놓고 한쪽에 쌓아둔 과자상자 더미를 가리키며, 모든 과자상자를 열어서 먹어도 좋은데, 단 붉은 상자만은 열지말라고 말한 뒤 장기간 외출을 하고 돌아온다.
붉은 상자와 선악과는 제공하는 편익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상통하며, 명확한 편익을 제공하는 자동차와는 상통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따르면, 사탄의 대행자인 뱀의 유혹에 조상이 넘어간 죄로 후손이 원죄를 지녔고,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인간의 원죄를 씻어줬다고 한다. 3족을 멸한 연좌제는 애교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사탄을 제거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가 사탄을 방치하는 것과 사탄으로 비롯된 악의 횡행을 심판하겠다는 것이 어색하다.
전능한 존재가 인간의 원죄를 씻어주면 간단한데, 굳이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을 거쳐 인간의 원죄를 씻어줬다는 대목도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간단할 수도 있는 것을 굳이 복잡하게 풀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엑소더스도 마찬가지다. 전능한 존재가 엑소더스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많았을텐데, 굳이 구약에 나오는 엑소더스 과정의 참상(이집트 유아 집단학살과 이집트 병력의 집단수몰)까지 왜 필요했을까? 유대인들에게 신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참혹한 시나리오가 필요했다(구약의 내용)면 이를 누가 납득할 수 있나?
거대사건(신이 인간의 원죄를 씻어줌)에 굳이 제물(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필요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울러 신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야만 거대사건이 완성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감동적인 종교 드라마를 위해서 이런 과정이 필요했다면 매우 어색하다. 자식들이 붉은 상자를 열 것을 다 아는 아버지가 외출하고 돌아와서 자식을 처벌하는 것은 석연치 않다. 물이 자연스레 흐르지 않고 어딘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각본없는 드라마인 축구에서 플레이어 각자는 자유로운 캐릭터가 분명하다. 각본 있는 드라마 속 캐릭터는 모든 것이 사전에 정해져 있으므로 자유로운 캐릭터일 수 없다. 전능한 존재의 각본이 이미 씌어진 상태에서 인간 개개인이 자유로운 캐릭터인지 여부는 시점에 따라 다르다.
1인칭 개인 시점으로는 개인이 자유로울 수도 있겠다(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좌우된다고 믿으므로).
신의 시점에서 개인이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도 개인도 아닌 제3자의 시점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는 명백히 없다.
성경 대목이나 교리 등에 대해 묻고 다닐 필요는 없다. 성경 저자도 인간이고, 교리를 만든 자도 인간이다. 성경 저자나 교리를 만든 자가 답변한다 한들 인간의 답변일 뿐이어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선악과와 인간의 원죄 여부에 대한 답변이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에 따라 또는 기독교 계파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다양한 그들의 답변 또한 지극히 인간적 답변일 뿐이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답을 얻으려 한다면 자신의 내면에 물어보라. 물음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내면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억지인 것 같아 납득이 잘 안된다든지 불합리하게 여겨지거나 수긍이 잘 안되면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이 바로 신의 답변에 가장 가깝다. 신의 답변은 양심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개인의 양심이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이 경우 상식이 양심을 대신할 수 있다. 상식은 개인 양심의 평균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이성은 시작부터 신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을 거역해서 받아낸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결국은 이성을 줄 것이면서도 시작부터 주진 않았고, 인간에게 거역당한 뒤 주게 될것임을 다 알고 있었다.
인간이 없을 경우 우주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인간 창조가 비극적이라 해도 납득은 된다. 원대한 전체가 운행되기 위해서 소소한 비극 정도가 감수되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에서 없어도 될 존재이며, 광활한 우주의 한 줌 먼지만도 못한 미물이다. 장구한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 출현은 느닷없고 뜬금없는 사건이다. 인간이 없었던 대부분의 시기에 우주는 나름대로 문제없이 굴러왔다.
인간 출현이 우주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건이라 해도 기독교에 따르면 유독 인간 창조만큼은 우주에서 매우 특별하다. 우주에서 인간만이 사후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신과 사후심판을 떼어내면, 언젠가 소멸될 우주에서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질 인간의 존재 의미는 거의 없다. 그런데 기독교 주장대로 신과 사후심판을 상정할 경우 인간 출현이라는 사건은 우주에서 절대 미미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과학적으로 우주에서 인간 출현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못된다. 그런데 기독교식으로 인간 출현을 보게 되면 인간출현은 우주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심장한 사건이 된다. 그 갭이 과학과 기독교의 갭이다. 인간 모두는 주심이라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과학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완전히 개운치는 않다.
과학에 따르면,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이에 역행하는 사실이 있다. 생명체가 없던 상태에서 생명체가 출현한 사실이 그것이다. 생명체의 메커니즘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이 질서정연하므로.
생명체가 없는 상태에서 생명체가 출현한 사실을 엔트로피(무질서도)가 감소한 상태로 볼 수 있다. 아무런 생명체가 없었던 초기 지구의 환경은 생명체가 득실거리는 작금의 지구 환경에 비해 무질서도가 훨씬 팽배했다고 할 수 있다. 엔트로피 증가라는 자연법칙에 따르면 생명체가 없는 상태에서 생명체가 생겨나선 안되는 것이다.
즉 초기 지구 환경에서 시간이 흘러 질서정연하고 정교한 생명체가 출현한 것은 분명 자연법칙(엔트로피 증가)에 반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 보라며) 바로 이 지점을 쌍수 들어 환영한다. 신을 끌어들이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 하지만 신을 끌어 들여서 이 지점을 벗어났다고 해도, (신을 끌어들임으로서 생겨난) 해결안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