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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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룩상부르 2024. 2. 10. 20:08

최규하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가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고,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으며 이 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유신 헌법을 따라 대통령을 뽑은 뒤 개헌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또한 최규하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10월 28일 비상회의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7일자로 소급해임했다. 육군대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 사령관이 되었다.

 

최규하는 10월 28일 전날 부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직을 면직하고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하여 수사를 지시했다. 10·26 사태 수사를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른 전두환은 이후 두각을 나타내며 정권탈취를 향해 맹렬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10.26 직후 육본 긴급국무회의 당시 최규하와 김계원은 박정희 시해 사실을 알면서도 김재규의 눈치를 보느라 국무회의에서 한동안 진상을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긴급국무회의가 김재규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까지 확인한 후 김재규의 동조세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김계원이 비로소 진상을 실토했다. 이 시점까지 최규하와 김계원의 행동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최규하는 이 점을 전두환에게 약점으로 잡혀 향후 질질 끌려가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무회의는 청와대에서 최규하 총리에 의해 열렸어야 하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으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최규하는 경호실에 명령을 내려 대통령 시해의 현장부터 확보하라는 지시부터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최규하는 김재규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김재규 의도대로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열었다. 김재규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최규하가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한 것이었다.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오기 전까지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가운데 진상을 밝히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듯 내각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어서 김재규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상황은 김재규가 주도했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육군이 단합했던 것처럼 보인 당시의 상황은 누가 봐도 막강했으며 실제로 김재규의 쿠데타는 거의 성공직전인 듯 보였다.

 

그러나 계엄선포를 해야한다는 김재규의 주장에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면서 김계원이 김재규의 배후에 동조 세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진상을 실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만약 김계원의 실토가 없었다면 김재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가 출현할 수도 있었다. 즉, 최종 단계까지 성공할 찰나에 김계원이 발을 뺌으로써, 정승화와 노재현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살해를 인정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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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이후 권력의 공백을 형식적으로 메운 것은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였으나 당시 그를 권력의 실체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권한대행의 자리는 국무총리였던 그가 헌법상 승계한 것이지만, 곧이어 12월 6일의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그가 10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에워싸고 있던 집단지도체제, 그 중에서도 군부 고위층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도기의 인물로 이렇다 할 자기 세력이 없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최규하가 얼굴마담으로 택해졌다. 실제 최규하를 대통령 후보로 민 것은 군부 고위층, 보다 구체적으로는 계엄사령관 정승화였다. 이론적으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군을 장악해야 하지만, 최규하의 경우 장악은커녕 오히려 군부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으며, 실권이 군부로 넘어가자 주도권을 놓고 군 내부에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12월 12일 저녁 약 6000명의 수도권 지역 군인들이 동원된 가운데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12.12사건이 일어났다. 하극상이었으며, 이는 유신정권의 안보를 위해 청와대 주변에 정치장교들을 양산해 내었던 데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었다. 그러다가 컨트롤타워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 정치장교들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 12·12사태의 본질이었다.

 

승자가 된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은 군 수사병력이 정승화를 체포하러 간 틈에 따로 20여 명의 경호병을 데리고 삼청동 공관으로 최규하를 찾아가 정승화의 체포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허가부터 받아오라”며 버텼으며, 그로부터 9시간30분을 버티다가 12월 13일 새벽 4시쯤 국방장관 노재현이 나타나 서명하는 것을 본 그도 체포동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는 정승화의 체포가 이미 이뤄지고 난 뒤의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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