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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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룩상부르 2024. 2. 5. 23:08

허우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대다수 영화작가는 영화를 재미없게 만든다. 재미없는 영화작가의 대표 격으로 허우샤오시엔을 들 수 있다. 허우샤오시엔의 롱테이크는 지루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오래전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에서 정‘적인 롱테이크에 하도 질린 필자는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피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가 만든 ‘자객 섭은낭’이라는 무협물을 접했는데, 역시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좀 먹냐는 식으로 한 없이 느릿느릿한 롱테이크는 ‘자객 섭은낭’에서도 여전했다. '슬로우 무비'란 장르를 설정한다면 위원장은 단연코 허우샤오시엔이 될 것이다.

 

‘자객 섭은낭’을 정‘적으로 보면 영상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긴 러닝타임을 지닌 영화를 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 영화가 사진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의 가치는 역시 이야기 흐름을 버무리는 구성에 있다는 소견.

 

답답하고 불필요한 장면이 없으면서 전개가 스피디한 일부 쇼부라더스 영화들이나 스릴러물이 취향에 맞는다.

 

영화평단도 문제가 많다. 실제로는 아무도 언급하거나 열거하지 않을 것 같은 작가영화들이 걸작의 반열에 무수히 올라 있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인지... 일종의 군중심리 같은 것이 평단내부에 자리해 있다. 남이 좋다니까 아뭇 소리 안하고 침묵하는 것 말이다.

 

작가영화의 단점은 드라마적 텐션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 드라마적 텐션을 위해 꼭 살인과 폭력같은 극단적 사건이 필요하진 않다.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이런 것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긴장감이 없으면 영화는 지루하고 따분해져서 몰입도 저하로 이어진다. 히치콕이 위대하고 봉준호가 좋은 작가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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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즐겁지 않음에도 영화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작가영화를 보긴 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영화적 교양을 위해서다. 문학적 교양을 위해 문학의 고전을 보듯이 영화적 교양을 위해 재미는 없더라도 영화의 고전인 작가영화를 보긴 해야 한다.

 

작가영화를 보게 되면 작가영화에 동조는 안해도 영화적 시야가 넓어지고 영화 취향이 크게 변한다. 재미 없다고 작가영화는 일체 안보고 대중영화만 보면 문학고전을 외면하고 대중문학만 보는 것과 같다. 시야가 좁아서 우물안 개구리에 그치게 된다. 그 결과 교양 부족으로 영화팬이나 문학팬이 될 수가 없다.

 

예전엔 대중영화를 좋아했지만 작가영화들을 접한 후 대중영화와 작가영화 어느 쪽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대중영화가 싫어졌고 작가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서, 영화의 매력을 상당부분 못느끼게 되었다. 영화 회의론자가 된 것이다. 필자가 저지라서 한쪽의 손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면 작가영화 쪽이긴 하지만 영화작가 가운데 좋아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싫어진 것은 아닌 듯하고 영화에 대한 갈증만 심해진 것 같다.

 

작가영화를 체험하는 것은 문학적 체험과 똑같다. 스토리 라인이 살아있는 대중문학이 재미는 있으나, 딱딱하고 지루한 문학적 고전들을 섭렵하고 나면 대중문학이 더 이상 재미있지만은 않고 진부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문학적 고전들을 선호하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문학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시는 이야기 단면들의 조합이다. 흐름은 연결에 무리가 없어야 하는 등의 제한이 있지만 조합은 연결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흐름이 존재의 변화를 묘사하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조합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것>은 흐름 상으로 불가능하지만 조합 상으로는 가능하다.

 

 

드라마를 포함 대중영화는 소설적 형식의 흐름에 충실하다. 작가영화는 소설적 형식의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따라서 색다른 영화가 된다. 평단은 이것을 가리켜 독창성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대중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재미도 없고 따분하며 지루하다. 드라마라면 시청률이 나올 리가 없고 영화라면 흥행이 되지 않는다.

 

흥행에 신경쓰지 않고 색다른 영화를 추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든 그들만의 리그가 영화제이고 평단이다. 영화제나 평단도 제각각인 것이 대중을 끌어들이려고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특정 장르에 특화하는 것도 이런 시도의 일환이다.

 

음악이건 영화건 문학이건 간에 핵심은 감성의 충족이다. 재미있든가 등골이 서늘한 긴장감을 주든가 여운이 있든가 감동을 주든가 해야 한다.

 

작가영화의 지극히 일부를 뺀 대부분은 실격이다. 대중영화의 대부분은 진부하다. 영화작가의 일부와 대중영화 감독의 일부가 쓸만하긴 한데, 양자택일하라면 영화작가 쪽이 좀 낫긴 한 것 같다. 해답은 그래도 영화작가 쪽에 있다는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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