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가계도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다. 뭐니뭐니 해도 복수가 최고의 이야기 감이다. 복수만큼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소재가 없다. 서구에서 최고의 복수 이야기가 몬테크리스트 백작이라면 국내에선 단연 연산군이다.
실제 역사였음에도 연산 스토리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했다. 당연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아마도 드라마나 영화의 종합적인 콘텐츠 양으로 볼 때 라이벌은 장희빈이 될 것이고, 수양대군이나 사도세자 이방원 명성황후 정도가 그 뒤를 이을 것이다.
대부분의 연산군 연기는 광기 표출인데, 그 가운데 아우에게 술 권하는 장면은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독을 탄 술잔과 보통 술잔 중 선택케 하는 이 장면에서, 연산은 엄청난 광기를 내부에 삭힌 채 소름끼치는 냉정함으로 상대를 쥐락펴락한다. 이런 연기는 특출난 음성연기가 필요한데 사극이라 유동근(‘장녹수’에서 연산을 연기함)만한 적임이 없다.
이민우는 <한명회>에서 당시 19세의 나이에 연산군을 맡아 ‘성인 연산군’ 역할로서 역대 최연소 캐스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장녹수>에서는 유동근이, <왕과 비>에서는 안재모가, <왕과나>에서는 정태우가 각각 연산군을 연기했다.
연산군 가계도
정태우는 <왕과 나>에서 광기어린 연산군 역할로 인수대비(전인화)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특히 폐비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오열하는 정태우의 연기는 눈길을 끌었다.
스토리를 뻔히 알면서도 볼 때마다 흥미진진한 것은 단연 연산군이다. 장희빈도 강렬하긴 하지만 드라마틱함에 있어 연산군에는 못미친다. 후궁들 간의 암투는 장희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고,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던 소재란 점에서 장희빈은 연산군에 비해 드라마가 다소 진부하다.
또한 연산군 하면 자동적으로 폐비윤씨가 따라 나오고 인수대비, 성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드라마적 얼개의 범위에 있어서 연산은 독보적으로 넓은 소재이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포함해 수많은 후궁 뿐 아니라 궁궐 기생들을 어마어마하게 들였는데, 전국의 젊고 예쁜 여성들을 궁궐로 들이기 위해 채홍사들을 파견했다. 궁궐로 들인 기생은 1만여 명을 헤아렸으며, 그 중 흥청이라고 이름붙인 1,000여 명의 기생은 아예 궁궐 안에 거주하게 해서 사실상 후궁으로 삼았다.
연산군은 심지어 수많은 관료들의 처와 자신의 큰어머니였던 박씨와 추문을 만들기도 했다. 권좌에서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주도자 박원종은 박씨의 동생이었다.
채홍사는 연산군이 미녀를 선발하기 위해 전국에 파견한 임시 관원이었다. 채홍사는 연산군 때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것에 비추어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荒淫)이 극도로 치달은 1504~1506년에 한정되어 운영된 비정상적이고 이례적 관직이었다.
채홍사 등으로 파견되어 좋은 성과를 올린 자에게 관직을 올려주고 노비와 토지를 주었는데, 이로 인해서 채홍사 등은 공을 탐한 나머지 경쟁과 불법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채홍사는 갑자사화 이후 파견되기 시작해 연산군의 폐출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어 공을 세우려는 채홍사의 활약상은 연산 시절 이후 4백년도 훨씬 더 지나 이 땅에서 슬그머니 재현됐다. 유신정권 시절 청와대 경호실은 채홍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연산 집권 시대처럼 노골적 관직으로 운영되지만 않았을 뿐, 유신정권 시기에 청와대 경호실이 수행한 일부 역할은 연산 시대 채홍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황제의 후궁
정식 사료에 기록된 중국황제는 406명에 달한다. 중국 황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후궁을 거느렸다.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황제로서 1만의 후궁을 거느렸지만, 죽을 때까지 황후를 두지 않았다. 진시황의 모친은 아들의 재위기간 동안 노애라는 가짜 환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두 아들을 낳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진시황은 두 의붓형제를 죽였다. 모친에 대한 환멸이 진시황으로 하여금 여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나아가 황후를 두지 않은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 무제는 1만 8천의 후궁을 거느렸는데, 후궁 숫자가 너무 많아 거처가 모자랄 판이라 건장궁을 지었다. 믿기 어렵지만 건장궁의 길이는 12km에 달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여자가 옆에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던 한 무제는 70세 때 17세 미녀 조구익으로부터 아들을 낳은 다음 그녀를 죽였다. '어린 황제가 등극하고 나이 많은 어머니 태후가 있으면 조정을 망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황제가 감당할 여성의 수가 엄청난 만큼 황실에서 갖가지 성애술과 비방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 그 결과 채택한 방식이 교접은 하되 사정은 않는 '접이불루'였다. 사정을 하면 정액을 방출하는 것과 함께 기와 열도 함께 방출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장수를 해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시각은 정액과 피를 본래 같은 것으로, 피는 기가 형태화한 것으로 보아 생긴 것이다.
소녀경에도 나오는 접이불루는 황제에게만 국한된 처방이지 일반인이 하게 되면 전립선 비대증이 생길 수도 있는 좋지않은 행위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듯이 정액도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