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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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태

룩상부르 2024. 1. 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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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태

 

 

10.26사태는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에서 김재규가 동석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사건 당시 연회에는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심수봉(가수), 신재순(모델)이 참석했고, 김재규의 초청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안가 별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연회장에서 박정희·차지철을 직접 살해하고 박흥주, 박선호 등 자신을 수행한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동원해서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제압시켰다.

 

김재규 행동의 원인에 대해 흔히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거론된다. 첫째, 김재규와 박정희·차지철 간의 야당 및 재야세력을 비롯한 반유신세력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 둘째,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김재규 본인의 신념 때문이라는 것, 셋째,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개인적인 증오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 넷째,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 등이다.

 

사건 직후 김재규는 사건의 전말을 숨긴 채 정승화를 대동하고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사태를 통제하려 시도했으나, 곧 범인임이 발각되어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사건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주요 각료들은 비상국무회의를 거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0.26사태 이후 진행된 피의자 신문조서 내용 중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결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재규는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처리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대통령 시해 후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했냐는 질문에 김재규는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다"고 답했다.

 

10.26사태 직후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가서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서 김재규의 눈치를 보느라 한 동안 침묵하다가,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따라서 김재규의 시나리오 대로 순조롭게 흐르려면,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뒷 처리를 맡기고 이동할 것이 아니라 김계원도 거사범위에 포함됐어야 했다. 또한 이후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당시 거사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 외 나머지 인원 전부 즉 신재순, 심수봉, 박상범(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까지 생존자 모두를 거사 범위에 포함했어야 했다.

 

결국 생존자를 남겼다는 자체가 김재규가 짠 시나리오의 흐름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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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생존자를 남긴 상태에서도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다수의 국무위원을 사전 포섭했더라면 가능성은 있었다. 육본 긴급국무회의 당시 최규하와 김계원은 박정희 시해 사실을 알면서도 김재규의 눈치를 보느라 국무회의에서 한동안 진상을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육본 긴급국무회의 당시에 김재규와 김재규가 사전 포섭한 국무위원 다수가 밀어부쳐 ‘48시간 보안유지 한 채 무조건 계엄 선포’가 긴급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최규하와 김계원은 김재규가 두려워 계속 침묵을 이어갈 것이다. 이렇게 흐르면, 김재규가 권한대행 최규하에게 합수본부장으로 전두환이 아닌 김재규 군라인이었던 수경사령관 전성각이나 특전사령관 정병주 또는 3군사령관 이건영을 천거해 임명을 관철시킬 수도 있었다.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의장 자리에 김재규 본인이 앉는 전략이 먹히려면, 국무위원 다수를 사전포섭하는 것이 필수였다. 이렇게 흘러갈 경우 김계원과 최규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을 것이기에. 4인의 생존자를 전원 제거한 뒤, 이 모두를 차지철에게 덮어씌웠다면 보안유지 같은 지저분한 조건이 없는 말끔한 계엄선포가 되고, 국무위원 다수를 사전포섭하지 않았어도 김재규의 시나리오 대로 흘러갈 가능성은 좀 더 높았다.

 

 

시해된 후 박정희가 후송됐던 국군수도病院은 보안사를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 있어서, 당시 전두환 소장의 보안사는 대통령 사망 2시간이 경과한 시점에서 일찌감치 대통령 사망 사실을 病院장을 통해 인지했었다. 이후 전두환은10·26 사태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정권탈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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